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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ernard

이시트의 섬들.

The islands of Isiteu.


 

‘이시트의 섬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곳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밤중의 광채 속으로,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로, 혹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곳으로.’


마침내 비가 그쳤다. 현관에 나가 보니 며칠 만에 맑게 갠 하늘이 화창했다. 파랗고 청명한 넓고 아득한 세상의 천장엔 조각난 구름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군도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쌀쌀한 날씨에 움츠러들었고, 두 팔로 몸을 감싸 얇은 옷깃을 붙잡았다. 정말 춥다. 앓는 소리를 내면서 도로 방으로 돌아갈까 망설였다. 마침 눈앞에 햇빛이 천천히 다가왔고, 나는 기꺼이 햇빛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바깥은 바람이 조금 불었지만 따뜻했다. 나는 그제야 산책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마당으로 나갔다.


3일 동안 비가 쉬지도 않고 쏟아졌다. 그동안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 이곳에서는 비가 오면 아주 춥기 때문이다. 높은 지역에서 비가 내리면 정말로 추워진다. 여긴 정말로 높은데, 하늘 위에 떠 있는 섬이라서 그렇다. 가끔은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서, 흙 속에 고인 빗물이 얼어붙을 때도 있다. 땅이 어는 건 상관없지만 텃밭에 있는 채소들이 죽어버리면 골치 아프다. 그렇게 귀중한 식량들을 한탕 잃고 나면 결국 폐허를 돌면서 농업용 비닐을 찾고 지붕을 짓게 된다.


담장에는 덩굴 줄기들과 이파리들이 잔뜩 이슬을 머금고 있다.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사소한 모습들을 보는 게 좋았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식물들은 내가 여태껏 이곳에서 제정신으로 지내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아주 작은 것들이지만 내겐 유독 중요하다. 저 바깥에는 이런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나는 번화가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서 혼자 산다. 아, 번화가라고 해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사람들은 5년 전에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 뒤로, 이 세상엔 어째서인지 나 혼자만 남았다.


가족과 함께 살던 예전 집은 너무 많이 망가져서 떠났다. 처음 깨어났을 땐, 평범하고 멀쩡했던 우리 집이 토해낸 온갖 잔해들에 눌려 죽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버려져 있던 것들 중에 그나마 덜 부서진 걸 고친 거다. 어릴 적에 잠깐 할머니 집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데, 그 집도 이곳처럼 크고 널찍한 마당이 있었다. 나는 그 자유롭고, 넓고, 단란한 장소가 좋았다. 아직도 그렇다. 비록 세상이 그 시절보다 더 고요해졌고, 지금은 어떤 곳이든 꾸준히 신경 써서 가꾸지 않으면 금방 폐허처럼 변하긴 하지만. 이젠 주위의 모든 것들을 가장 아름다웠던 상태로 고치는 게 내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 날 이후로는 뭘 심어도 쉽사리 싹이 트질 않는다. 땅은 대부분 불모지처럼 변해가고 있다. 지난 5년간 이곳은 그래도 비교적 괜찮았지만, 요즘은 또 기후 자체가 변하고 있는 것 같다. 계속 추워지고, 가끔씩은 눈도 내린다. 오늘 같이 따뜻한 날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가 아무도 살지 못할 땅이 된다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벌써 다른 작은 섬들 대부분은 사라졌다. 며칠 전에 섬 하나가 죽어가는 모습을 봤다. 허공에서, 멀리 홀로 떨어져 있던 거대한 하늘 위의 흙더미는 부스러지고, 금이 가더니 힘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섬들이 죽어가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는데, 내 생각엔 앞으로 시간이 1년 정도 남은 것 같다. 1년 안에 나는 이 섬과 함께 떨어져 죽거나, 저 밑에서 죽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다. 그런데, 여긴 너무 높아서 내려갈 방법도 모르겠다. 아마 떨어져 죽으려나 싶다. 만약 내려간다고 해도, 저 밑은 사람이 살기에 최악이다. 금방 얼거나 굶어 죽고 말 거다.


간단하게 전날 끓여두었던 수프로 끼니를 때우고, 본격적으로 산책을 하기로 했다. 낡아서 삐걱거리는 마당 출입문을 지나 망가진 것들 사이로 걸어간다. 우중충한 모습들. 폐허가 되어 버린 마을엔 고쳐내면 쓸 만한 것들이 많다. 가끔 눈에 띄는 골동품들이 보이는 편인데, 나는 이런 것들을 창고에 쌓아 놓는다. 이런 것들을 만지작거리면서 오후 시간을 보내고 나면, 또 다른 골동품이 하나 생긴다. 나는 워낙 즉흥적으로, 완성했을 때의 용도에 상관없이 작업해서 결과물은 대부분 쓸모없는 것들이다. 그래도 나름 애정이 있어서 보통 완성한 것들은 내 방 진열대 위에 놓아두고 있다.


나도 예전부터 이렇게 할 일 없이 폐품이나 손보고 있던 것 아니다. 5년 전에는 이곳에 사람이 정말 많았다. 저 집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곳이 온통 쓰레기뿐인 걸 보면 알 수 있다. 저건 모두 만들어낸 거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뭔가를 끊임없이 만들었다. 편의를 위한 기계들을 위해 땅을 파서 광석들을 캐내고, 들판을 불태워 집을 짓고, 그렇게 끝없이 짓고, 만들어대도 섬의 풍요로움은 다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는데. 어쨌든 그날 이후로 사람들이 전부 사라지고 나서는 모두 그대로 남았다. 인간의 산물들은 저렇게 녹슬고 망가져서 불쾌한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이 지루한 곳에서 취미라고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예전부터 해왔던 것들은 더더욱 없다. 줄곧 책을 읽긴 했는데, 정말 괜찮은 책들은 진즉에 다 읽어버렸다. 여기 사람들은 독서에 그렇게 관심이 없어서 남아 있는 책들도 적다. 매번 폐허에서 새로운 책들을 찾아내긴 하지만 문장들이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물론 내용도 마찬가지였다.


독서와 골동품 수집 말고는 주로 섬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아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곤 한다. 섬은 너무 높은 곳에 있고, 난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편이라 벼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는다. 그렇게 있으면 기분이 정말 좋다. 위를 보고 있으면 하늘 위에서 홀로 둥둥 떠 있는 기분이다. 보이는 장애물이라곤 듬성듬성 보이는 구름들뿐이고, 그런 것들 말고는 시야를 가로막는 것들이 없다. 보이는 거라곤 허공밖에 없지만 우울할 땐 나름 특효약이다. 가끔 그렇게 잠들기도 하는데, 일어나보면 멀리 석양이 지고 있을 때도 있다. 세상 끝에서 황혼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란, 누구라도 이런 걸 쉽게 표현할 수 없을 거다. 시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해서 시 비슷한 어쭙잖은 감상을 직접 써보긴 했는데, 아무래도 짧은 글을 쓰는 재주가 내겐 없는지 잘 되지 않아서 몇 번 시도하다가 말았다.


광장에 온 건 오랜만이다. 대리석 석상과 기둥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광장은 이 섬에서 가장 오래된 곳인데. 수천 년 동안 무너지지 않고 용케 버텨왔다. 이제는 곳곳에 금이 가고 붕괴된 곳도 많다. 온전하진 않지만 내가 이 마을에서 내 집 말고 유일하게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건축물이다. 사실 5년 전에는 아름다웠던 것들이 꽤나 많았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광장은 옛날과 비교해서 그 날 이후로 가장 변화가 적었다. 잘 보존된 것들은 그게 무엇이든 나름대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그건 꽤나 괜찮은 경험이다.


이곳에서 가장 잘 보이는 것이 있다. 멀지 않은 곳에, 앙상하고 거대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눈에 띄게 쪼그라들고, 말랐지만 나는 저 꽃이 가장 아름다웠을 때를 기억한다. 저게 모든 것의 원흉이다. 저건 피어서는 안 될 꽃이었다. 사실은, 꽃이면서도, 일종의 마법이었다. 이시트가 섬에 내린 저주였다. 꽃의 상태는 그걸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거다. 지금은 시들고 쪼그라든 꽃잎이 모두 저렇게 떨어져 있지만, 예전엔 그냥 봉오리였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 보자면. 먼 옛날에, 아마도,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에, 처음엔 얼어붙은 호수가 있었다. 세월이 흘러서 호수의 중심엔 작은 세계만큼이나 거대한 나무가 자라났다. 나무의 가장 높은 곳엔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커다란 꽃이 피었다. 꽃은 구름보다도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본 적이 없어서, 꽃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시트라는 마법사가 우연히 발견하기 전까지는.


마법사들은 기이하고, 어딘가 모르게 음침한 구석이 있지만. 늘 아무도 생각 못한 일들을 해냈다. 본래 있던 굉장한 것에 마법을 써서 더 굉장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마법사들의 일들 중 하나였다. 그들은 대개 혼자 생활하며, 세상을 떠돌면서 자기 일을 스스로 찾아낸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마법사들이다. 그렇지 않은 마법사도 있지만, 마법사들은 보편적으로 제멋대로인 성향이 있다. 그들의 마법이 제멋대로인 것처럼 말이다.


이시트는 아주 젊고, 똑똑하고, 능력 있는 마법사였다. 그녀는 특히 자연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것들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곳에서 홀로 자라난, 다른 어떤 것들보다 거대한 나무와, 그 나무가 피워낸 아주 커다랗고 화려한 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놀란 이유는 당연하게도, 호수의 주변 땅들은 모두 척박하고 아주 추운 극지방의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무가 있는 곳은 기후부터가 달랐다. 따뜻하고, 평화로웠으며, 풍요로웠다. 사람들은 호수와 나무를 축복으로 여기고 호수 주변의 땅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나룻배를 타고 나가 낚시를 하고, 물 위에 집을 짓기도 했다.


이시트는 자신이 이 신비롭고, 풍요롭고 혹독한 땅에서 무엇인가 더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마법으로 이 지역이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이시트는 곧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서 며칠간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마침내 문을 박차고 나오더니 화창한 하늘 위로 올라갔다. 이시트는 커다란 나무의 주변에 마법으로 크고 작은 섬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섬들은 각자 하늘에 둥둥 떠 있었다. 커다란 섬들에는 심지어 강과 숲, 산들이 있기도 했다. 물줄기들은 섬의 가장자리에서 허공을 만나 호수로, 아래로 떨어졌다. 아래 땅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시트가 하는 일들을 모두 봤고, 섬들이 자기네 집 위에 생길까 봐, 두려움에 그만두라고 소리치며 말렸다. 그들은 모두 자기네 집 위에 섬들이 떨어질까 봐 걱정했지만, 이시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시트는 섬들을 만들고, 아주 아름답게 만드는 데 평생을 쏟았다. 그녀는 정말로 열심히 일했고,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도 자기들 위에 완성되어가는 부유하는 낙원들을 보고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시트의 섬들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이시트는 나이가 들어 자신이 죽을 때가 되자 마을로 내려와 말한다.

“여러분들이 저 섬들을 채워주세요. 여긴 너무도 춥고, 척박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죠. 하지만 저 위는 분명 이곳보다 훨씬 따뜻하고, 아름다운데다, 풍요로워요. 다들 여기보다는 훨씬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을 거예요. 거긴 모든 게 있으니까요. 여러분들이 원하는 건 모두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릴 필요도 없어요. 더 이상 주위의 원래 여러분들에게 가혹했던 것들 때문에 고통 받을 필요도 없어요. 저 위로 올라가면 다들 낙원에서, 완벽한 곳에서 각자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하지만, 한 가지 조심해야할 게 있어요. 제 섬에 사람들이 많으면 분명 좋을 테지만, 제 섬들은 너무 많은 사람들을 감당하진 못해요.”


다들 눈에 희망을 품은 채로 이시트를 본다. 저런 완벽한 곳에서 살 수 있다니! 정말로 꿈만 같았을 것이다.


이시트가 말한다.

“사람들이 한계 이상으로 늘어나면, 마법이 견딜 수 없을 거예요. 제 마법은 너무 독립적이고, 개성이 강해서, 무슨 일을 벌일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어요. 제가 짐작하건데, 여러분들을 모두 쫓아낼지도 몰라요.”


그러자 한 아이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묻는다.

“쫓아낸다니요? 어떻게요? 전부 죽는 거예요?”


아이는 이시트의 말에 기대로 부풀어 있었지만, 이시트의 이야기에 너무 이입한 탓에, 쫓겨난다는 말을 듣자 당황했고, 울기 직전이었다.


이시트는 아이를 달래려 다가갔고, 쪼그려 앉고는 아이와 눈을 맞췄다. 이시트는 아주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한다.

“걱정하지 마렴, 아가야. 네 세대에서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이건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겪게 될 미래에 대한 경고란다.”


이시트는 사람들을 돌아봤다. 이시트가 말한다.

“나무의 가장 높은 곳의 꽃봉오리에 또 다른 마법을 걸어 놓고, 주변에 가장 커다란 섬을 만들어 뒀어요. 그곳에서는 다들 봉오리를 볼 수 있을 거예요. 명심하세요. 그 봉오리는 섬에 사람이 많아질수록 성장할 거예요. 마법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인구가 많아지면, 봉오리는 눈에 띄게 커져서 개화 직전의 상태가 될 텐데, 거기서 개화하면 모두 끝장이에요. 그 이후엔 다들 어떻게 될지 저도 몰라요. 한 가지 확실한 건, 섬들은 끔찍한 결말을 맞게 될 거란 거예요. 그건 명확한 사실이에요. 이 이야기는 절대 잊지 마세요. 기록하고, 책으로 써서 간직하고, 여러분들의 아이에게 읽게 하세요. 매년 섬의 탄생과 위대한 마법을 기념하는 날을 제정하고, 그 날은 반드시 모든 사람들이 한 번씩은 이 경고를 또다시 되새기게 해야 할 겁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섬으로 왔다. 그들은 처음엔 내가 있는 이곳, 중앙 섬에서 모여 살다가 인구가 늘어나자 다른 섬들에도 옮겨 갔다. 아이들은 점점 늘어났고, 늘어나다가 오늘에 이르렀다.


나는 버려진 어떤 한 건물에서 섬의 인구조사 통계가 기록된 종이들을 본 적이 있다. 봉오리가 완전히 개화하기 5년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통계였다. 종이더미의 가장 마지막 장. 제일 아래쪽 부분엔 굵게 강조된 숫자가 적혀 있었다. 5,201,629만 명.




16월 7일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날이다.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알았다. 산아제한 정책은 실패했다. 늘어나는 인구는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우리들의 게으른 정부는 느릿하게 대책을 내놓으며, 어설픈 제도들을 새로 만들긴 했지만, 그리 효과적이진 못했다.) 봉오리는 나날이 부풀어 올라 거의 개화 직전이었다.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두드러지는 꽃의 변화에 단순히 호기심만 가질 뿐이었다.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없진 않았다. 그들은 종말에 대해 지속적으로 경고하며, 시민들과 정부의 태도를 비판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다들 종말을 피할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모든 것들이 끝이 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태만했고, 종말 앞에서 너무나도 무신경했다. 그들은 옛날이야기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랬다.


결국 봉오리는 개화했고, 밤중에 피어난 꽃이 굉장히 아름다웠던 것이 기억난다. 섬들은 몇 분 동안 심하게 흔들거렸다. 사람들이 가만히 서 있질 못하고 휘청거리거나 쓰러졌다. 꽃에서 엄청나게 밝은 빛이 새어나와 세상을 모두 채웠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엄청난 굉음들과, 외침들, 속삭임들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굴러다녔다. 꿈을 꾸는 동안 짧은 이미지들이 지나갔는데, 대부분은 기이하게도 어린 시절 기억들의 단편이었다. 예전엔 떠올리려고 해도 생각나지 않던 기억들도 있었다. 걸음마를 배웠을 때 스스로 마당을 한 바퀴 돌았던 일. 처음으로 글을 읽고 썼던 일. 작은 아이였을 때, 누군가와 흙 속에서 뒹굴며 장난치고, 앵앵 울다가 홀로 남았던 일. 사람들 앞에서 서툴게 행동하고, 한껏 반항을 부려봤던 일. 아버지와 처음 숲으로 들어가 흐르는 개울과 고목들을 지나 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봤던 일. 그 모든 변화의 순간들.


홀로 깨어났을 땐 모든 것이 예전과 달랐다. 아무도 없었고, 외로웠다. 주변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던 것처럼 여기저기 움푹 팬 구덩이들이 있었고, 밤의 어둠 사이로 내비치는 새하얀 달빛 아래에서 산산 조각난 내 집이 보였다. 꽃은 시들어 있었다. 나무도 죽은 것처럼 이파리들이 검게 물들어 까마득한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아름답지 않았다. 그렇게 나 혼자 남겨진 채로 이렇게 5년이 흐른 거다.




나는 사람들에 대해서 기억하지 못한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가까웠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한 번씩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도. 나는 그들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곳에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이것도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모든 게 내 망상이라면, 이 세상에 인간은 처음부터 나 혼자뿐이었다면, 대체 그 기억들은 왜 존재하는 걸까?


그 기억들이 날 괴롭게 하진 않지만, 난 어째서인지 상실감을 느낀다. 어딘가가 텅 빈 느낌, 마음이 공허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곳에선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았다. 난 그냥 늙어가고, 죽어갈 뿐이다. 삶은 무의미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왔다. 멀리 보이는 하늘이 오렌지색인 게 참 예쁘다. 여기서 유일하게 좋은 건 저 탁 트인 하늘과, 내 집 뿐이었다. 나는 지금 지쳐 있다. 오랜만에 섬 이곳저곳을 열정적으로 돌아보는 데 하루를 다 쓴 탓이다. 젠장, 앞으로의 죽음에 대해, 앞으로의 삶에 대해 두려움이 든다. 난 고독 속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누구나 고독 속에서 길을 잃는다.




또 다시 밤이다. 오늘은 달빛도, 별빛도 없다. 섬은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어둠 속에. 죽어가는 채로.




어째서 별들이 없는 거지? 나는 생각했다. 별들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검은 하늘은 마치 불타는 재 속 연기처럼 뿌옇고, 몽글거렸다. 내 머리의 한참 위에서, 경계가 없는 덩어리들은 꾸물거리며 어딘가로 끊임없이 나아간다. 체념한 채로 행동한다는 건 힘든 일이고, 작고, 말라붙은 한 줌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나는 그 어떤 목적도 없었지만, 일어나서 마당으로 갔다. 나는 익숙한 길들과, 기둥들과, 주인 없는 상점들과, 재배되지 않는 밭들. 흔적들, 더 이상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는 그 침묵하는 흔적들 사이를 가로질러 어둠 속으로 향했다. 저 멀리 포효하는 실낱같은 빛들.




꽃은 다시 피어났다. 5년 만에. 세상이 온통 새하얘질 것만 같은 강렬한 광채와 함께. 주변이 너무나도 밝았고, 나는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밝아졌다 새카매졌다 하는 요란한 풍경들이 협소한 시야 사이로 언뜻 스쳐갔다. 저 빛에 몸을 던진다면. 종말 속으로, 아니, 우리는 그걸 종말이라고 부르지만, 그건 종말이 아니다. 우리는 말들을 만들어내고 내뱉는 데에 너무나도 서툴러서 매번 실수하고 만다. 변하지 않으면서 변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위해, 우리는 늘 새로운 단어들을 생각해내야 한다. 느리게, 느리게 기다려서 떠오른 것들을 집어낸다. 이름을 짓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그건 본질을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고심을 거듭했지만, 반드시 걸맞은 단어를 떠올리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신비로운 마법들 속에서, 광막함과 죽음뿐인 이 세계에서 끝내 제멋대로 개화한 한 송이 꽃을 수 시간 동안 멍하니 바라본 끝에, 나는 마침내 두 번째 종말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깨달았다.


“변화”


종말이 언제나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무언가가 사라지고 나면 끝내 다른 무엇인가가 오고야 만다. 그걸 종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분명 그럴 수도 있을 테지만, 나는 다른 단어가, 내가 선택한 말이 조금 더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세상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지난 5년 동안 그저 폐허 속을 방황하기만 했고, 예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세상이 변한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기에 제자리걸음만 했다. 아름답지 않은 것들을 아름답지 않게 고치고 있었고, 아름다운 것들을 아름답게 고치고 있었다. 나는 5년 전에 세상이 변하는 걸 멈췄다고 생각했기에 계속 돌아가려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도 끊임없이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변화는 늘 존재한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마찬가지다. 우린 늘 보고 싶은 것들만 보려고 하면서도, 세상이 끊임없이 변하면서, 끊임없이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있다. 내 눈 앞에 피어난 꽃은 변화였다. 그건 분명 내가 언제나, 언제나 원하던 것이었다.


나는 아득한 빛 속으로 뛰어들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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